2025년 5월 개봉한 영화 <파과>는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 작품입니다. ‘파과(破果)’는 문자 그대로 ‘부서진 과일’을 의미하며, 영화는 이 제목처럼 더 이상 온전하지 않은 존재들—특히 늙고 버림받은 여성 킬러—의 삶을 조명합니다. 전설적인 킬러 ‘조각’과 그녀를 향해 복수심을 품고 다가오는 청년 킬러 ‘투우’의 대결 구도를 중심으로, 영화는 인간성과 폭력, 세대 간 대립이라는 주제를 날카롭고도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이 글에서는 <파과>를 세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설적인 킬러 ‘조각’,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
영화 <파과>의 중심 인물은 바로 조각(이혜영 분)입니다. 그녀는 60대 여성 킬러로, ‘신성방역’이라는 그림자 조직에서 40년 가까이 활동한 베테랑입니다.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 채, 임무만을 수행하며 살아온 그녀는 더 이상 쓸모없어진 존재로 간주되며 조직에 의해 제거 대상이 됩니다. 이는 곧 조각이 속했던 세계에서의 추방을 뜻하며, 조각은 생존을 위해 조직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조각의 삶은 단순한 ‘킬러의 퇴장’으로 요약되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녀의 일상과 말투, 표정 하나하나를 통해 ‘기능만 남은 인간’의 초상을 담아냅니다. 그녀는 감정을 억누른 채 살았지만, 내면 깊숙이에는 인간으로서의 회한과 공허함, 때로는 죄책감이 서려 있습니다. 조직이 그녀에게 던진 마지막 임무는 단순한 제거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말소’에 가깝습니다.
이혜영 배우는 조각의 무게감 있는 감정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며,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킵니다. 조각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액션 영웅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았고 이제는 잊힌 존재입니다. 그녀는 부서졌지만, 그 파편 속에서도 생존과 존엄을 찾으려는 인물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청년 킬러 ‘투우’와의 충돌
조각의 맞은편에 선 인물은 투우(김성철 분)입니다. 젊고 민첩한 킬러 투우는 조각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그녀를 추적합니다. 과거 조각에게 아버지를 잃은 투우는 냉혹한 복수심으로 무장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폭력에 길들여진 존재’라는 점에서 조각과 닮아 있습니다. 영화는 단순한 선악 대결이 아니라, 상처 입은 두 인간의 충돌을 통해 세대 간 가치의 충돌, 폭력의 유산, 인간성의 흔적 등을 질문합니다.
조각과 투우는 각각 다른 세대에 속하지만, 동일한 구조 안에서 길러지고 파괴된 인물들입니다. 조직은 이들에게 생존을 위한 기술과 살인의 효율성만을 가르쳤고, 감정은 사치이자 약점으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투우는 조각을 증오하면서도, 어쩌면 자신과 닮은 미래를 보며 두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두 인물의 대립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과 심리적 전투로 확장됩니다. 조각이 투우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투우가 조각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단지 킬러 영화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여성 서사의 새로운 지평: ‘퇴장당한 존재들’의 목소리
<파과>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노년 여성 액션 주인공’을 내세웁니다. 이는 단순히 성별의 전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각이라는 인물은 ‘사회에서 이미 퇴장당한 존재’로서, 영화가 주류 서사에서 배제되었던 목소리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60대 여성, 킬러, 폐기 대상—이 모든 설정은 조각이 얼마나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녔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며,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합니다. 그 이중성을 통해 영화는 ‘폭력의 연쇄’를 말합니다. 조각이 휘두른 폭력은 그녀에게도 가해졌던 것이며, 그런 점에서 투우 역시 새로운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영화는 폭력을 미화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인간에게 남기는 상흔을 응시하며, ‘무너진 삶 속에서 존엄을 지키는 것’이 진짜 투쟁임을 보여줍니다. 액션 장면 역시 스타일리시함보다는 인물의 감정과 현실성을 살리는 데 집중하며, 무게감 있는 이야기로 관객을 몰입시킵니다.
이러한 여성 서사는 더 이상 ‘보조적인’ 이야기나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시대적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할 중심 서사임을 이 영화는 증명합니다.
마치며: 부서졌지만 끝까지 싸운다는 것
<파과>는 제목처럼 ‘부서진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져 있었지만, 영화는 그녀가 그 파편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을 지키려 했던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싸움은 복수도, 정의도 아닌, 존재에 대한 고집스러운 증명이자, 존엄의 사수입니다.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와 구조, 그리고 묵직한 메시지까지 갖춘 <파과>는 단순한 액션물이 아닌,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로 남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직에 의해 쓸모없어졌다는 이유로 사라지는 수많은 존재들을 대신해 조각은 말합니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